- 책자형 공보물이 ‘책자’가 아니다?
270 * 190, 종이 한 장에 진보신당의 비전을 담아라
지방선거와 총선, 각종 보궐선거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해 선거를 치르고 나면 전국곳곳에서 공보물들이 쓰레기가 되어 홍수를 이룬다. 유권자들의 눈길이 한 번쯤 멎는다면 그 자체로 성공. 봉투째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기가 예사다.
더군다나 의원 하나 없는 가난한 진보신당. 부자정당들이 최고의 디자이너들을 투입하여 만들어내는 여덟 쪽 짜리 공보물 같은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전국 2900만 유권자들에게 보내는 ‘진보신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선거 책자형 공보물’은 ‘책자’가 아니다.
가로 190mm, 세로 270mm 짜리 종이 한 장을 만드는 것. 거기에다 진보신당의 비전과 메시지를 담는 ‘미션 임파서블’이라니! 그 좌충우돌 제작기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모퉁이에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 라고 쓸까?”
공보 기획을 시작한 3월 초는 민통당과 통진당이 진보신당을 소외시키고 ‘두당연대’를 맺은 때였다. 뿐만 아니라 ‘두당연대’는 탈핵, 한미FTA, 비정규직 문제 등 진보정당으로서 갖춰야할 가치와 원칙에서 은근슬쩍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간판만 바꾸는 야권연대로는 정권을 바꿔도 소용이 없다고, 정권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야권연대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골자로 하는 컨셉을 고민했지만, 선거가 임박한 시기인 만큼 ‘네거티브’가 아닌 ‘포지티브’ 전략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넘쳐나는 공보물들 사이에서, 그것도 쌈빡하고 두툼한 공보물의 홍수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도 막막한 과제였다. 빨간 바탕에 “이게 사는건가?”를 큼지막하게 집어넣을까? 상단 모퉁이에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ㅠㅠ’라고 써넣을까?
▲ 넘쳐나는 공보물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빠리의 택시운전사와 비정규직 청소노동자의 만남, 또는 동행
머리 싸매고 고민하던 공보 기획팀을 구원한 것은 다름아닌 김순자 후보였다. 울산에서 10년을 청소노동자로 살았고, 열악한 근무환경과 고용해지에 맞서 현대자본과 싸워온 김순자 후보가 15일, 비례대표 1번 출마를 어렵게 수락하신 것이다.
그렇지, 진보신당의 자산은 당 정체성을 몸으로 증명하는 후보들 그리고 진보정치의 비전을 담은 해박한 정책, 그 둘 뿐이지 않던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를 대변하는 김순자 후보, 그리고 성장지상주의와 삼성공화국, 학벌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발언해온 비판적 지식인 홍세화 대표. 그 두 사람이 만났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연대’이며,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부르는 정치가 아닌가.
얼개를 잡자마자 당장 촬영 스케줄부터 짰다. 남산 산책길에서 두 분이 환하게 웃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모습, 명동 거리에 스쳐지나가는 인파 사이로 두 사람이 ‘운명처럼’ 만나는 장면.... 김순자와 홍세화가 함께 있는 모습, 상상만 해도 설렜다. 그러나.
“남산은 처음 오셨나요?” “네” ...침묵.
아아, 우리는 깜빡 잊고 있었다. 시민들과 눈 맞추며 당 홍보물을 나눠달라고 해도, 기자들의 포토타임을 위해 약간의 모션을 취해달라고 해도 “나 그런 거 못해” 벌개진 얼굴로 손사레를 치시는 홍세화 대표의 못말리는 수줍음을.
그냥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시면 된다고 촬영진이 주문했지만, 초반에 두 분의 대화는 이랬다.
“남산은 처음 오셨나요?” “네” .... 침묵.
“울산에서 계속 나고 자라셨나요?” “네” ..... 침묵.
“프랑스에서는 애를 낳고도 결혼 안한답니다” “그렇군요” ...... 침묵.
시간이 지나면서 김순자 후보가 울산에서 노조 만들던 과정, 농성 때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풀어나가면서 드디어 사진이 나오기 시작했다. 요런 사진이.
▲ 남산 오솔길, 김순자 후보의 천막농성 이야기 어디쯤에선가 카메라에 잡힌 장면.
‘비례대표 선거 책자형 공보물’에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할 것은 후보자의 사진과 학력/경력 등 기본 정보와 당 정책 슬로건과 기조. 하지만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들은 일곱 명 전원이 학력을 기재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한 건, 학력을 넣자 빼자 별다른 논박 없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의견이 수렴되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정책이었다. 열 다섯 줄을 넣어야 한다는 정책위원회와 글자를 최대한 줄이려는 기획팀 사이에 팽팽한 전선이 형성되었고, 결국 정책위에서 제시한 안이 통과되었다. 한국사회에서 털어버려야 할 다섯 가지 ‘탈탈탈’ 그리고 새 시대를 두드리는 다섯 가지 제안 ‘톡톡톡’ !
이외에도 공보물 한 장 만들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은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만큼 많다. 최종 시안을 다 뽑아놨는데 박노자가 ‘박노자’ 아니라 ‘티코노프 블라디미르’란 얘길 듣고 당사가 충격에 빠진 건, 우리 티코노프블라디미르 당원의 국회 입성도전기 중 손톱만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영상팀의 후일담 다큐 제작을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진보신당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2008년 총선 당시 제작된 선거공보는 20여억 장. 사용된 종이의 무게만도 12,000톤. 종이 1톤을 제작하는 데 30년생 나무 열 일곱 그루가 필요하다고 하니 20만 그루 이상의 나무가 잘려나간 셈이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소금꽃나무>를 내면서 ‘책이랍시고 만드느라 잘려나갈 나무가 아까운 일’이라 얘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단 하루도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이야기, 김진숙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더군다나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 나무들은 족히 제 몫을 다하였으리라.
비례대표 공보물을 만들면서도 내내 그런 강박관념에 빠져 살았던 것 같다. 이 공보물을 만들기 위해 잘려나가는 나무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만큼, 우리가 담아내야 할 메시지를 제대로 싣고 유권자들의 마음에 가닿아야 한다고. 공보물이 가가호호 날아들 4월 초, 유권자 여러분의 판단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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