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지방자치 - 기대, 현실, 희망
서형원 / 과천시의회 의원
숲 속을 헤매는 사람에게 숲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아직 자신의 좌표조차 확인하지 못한 처지에 풀뿌리 지방자치의 전반을 논한다는 게 무모하게 느껴진다. 지방자치 현장에 들어오기 전에 풀뿌리 지방자치에 관해 기대했던 바를 떠올리며 정리해보고, 현장에서 느끼는 지방자치의 현실을 그 기대와 비교해보며, 희망을 이어갈 근거도 생각해보고자 한다.
1. 풀뿌리 지방자치에서 무얼 기대했나?
질문은 하나다. 우리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지난 선거에서 패배를 맛보기 전까지, 그 공간은 생활현장으로서의 지역이고 그 실천 형태는 생활인의 지역정치운동이며 초록의 가치를 지향하는 지역정당이야말로 그 조직화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해왔다. 지역에서의 대안, 즉 다른 삶 만들기와 지역을 넘어선 연대, 즉 지역정당 네트워크가 변화의 절박성에 부응할 실천이라는 것이다.
“… 삶의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과 힘을 공간적으로는 지역, 주체로는 생활인들의 풀뿌리 정치운동에서 찾아보면서, 변화의 실질적 힘은 풀뿌리의 연대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자치역량, 즉 지역정당운동이 그 구체적인 모습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운동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판을 짜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변화의 길이 아닌가 하는 제안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안은 시장의 야만에 모든 것을 맡기는 현재의 삶을 극복하려는 기획의 일부면서 동시에, 국가주의 정치에 대한 비판, 권력 장악이 사회변화의 가장 유력한 길이라는 사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개선과 개혁의 집합으로 참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시민사회운동의 다양한 대안 가치를 변화의 포괄적 비전으로 통합하는 새로운 운동으로서 초록의 정치운동을 전망하고 있기도 합니다.”
1) 삶을 지키고 변혁할 유력한 공간인 지역
풀뿌리 지방자치에 대한 기대는 국가라는 틀에 엄격히 갇힌 정치로는 이제 변화를 추구하기는커녕 나와 이웃의 삶을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데서 출발한다.
“동네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겠다는 결정, 교통난과 오염을 덜어보자는 지역 정책조차 이제는 지구정치의 역학관계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친환경 우리 농산물로 학교 급식을 하자는 지방정부 조례가 ‘세계무역기구(WTO)’ 규정과 충돌한다는 이유로 법원에 제소되어 무산되고, 경차에 주차비 혜택을 주자는 지방의회의 결정은 큰 차를 만드는 초국적 자동차회사들이 반대하여 좌절되고 있다. 이제는 지역이, 지구를 누비는 권력들과 풀뿌리 생활인들의 욕구가 충돌하는 첨예한 정치현장이 되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아주 흥미롭게도, 풀뿌리 주체들이 다른 누구보다 지구정치의 주체로 나설 절박성을 갖게 되었다. 학교급식 사례에서 국가는 WTO 협정과 충돌할 것이라는 우려를 들어 이들 조례를 법원에 제소하는 배역을 맡았다. 이 험악한 지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는 나를, 내 아이의 건강을 책임져줄 위치에 있지 않다. 적어도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반면 생활인으로서 필자는 이렇게 느끼고 행동한다. 풀뿌리정치, 우리 동네의 생활인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지역정치라는 장에서는 나를 홀대하지 않고 (국가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지구적 권력들로부터) 지켜줄 정치적 힘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 수준의 정치를 지구정치와 풀뿌리정치 양쪽으로 확장한다는 초록정치운동의 과제는 한 과제의 두 측면이라 할 것이다.”
2) “자치=정치”를 실현할 공간인 지역
지방자치에 대한 두 번째 기대는 말 그대로 자치가 가능한 공간적 범위라는 데서 나온다. 정치운동이든 시민사회운동이든 자치 역량을 만들지 못하는 운동은 변화에 기여할 수 없다고 믿는다. 개혁정부와 이를 만든 온오프라인의 정치참여 물결은 자치공간을 여전히 장악한 풀뿌리 수구냉전주의의 두께에 밀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다. 생태 자치를 만들지 못한 생태운동도 비슷한 신세다. 서울에서 파견된 환경운동가가 댐 건설을 막고 지역을 떠나면 그 지역은 다시 관광개발의 열풍에 다시 휘말리는 식의 일이 무한히 되풀이 된다.
정치든 시민사회든, 대신 해줘서 얻은 결과는 생명력을 가지지 못한다. 스스로,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뒷받침할 수밖에 없다. 자치에 주목한다는 것은 큰 권력 대신 작은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도적 권력을 얻든 못 얻든 자치의 역량을 키우는 과정을 밟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정치운동은 권력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전제로 한다. 바람직한 세력으로 권력을 교체한다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중된 권력을 생활인들 자신의 결정으로 분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권력을 장악해야 그 권력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다수가 될 때도, 소수가 될 때도 있다. 시장, 군수가 된다고 해도 그것은 긴 정치과정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 그 모든 굴곡의 과정을 통해 장기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지역정치운동의 목적이다.”
자치는 생활인 스스로의 자치를 의미하며,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생활공간인 지역에서 작동 가능하다. 생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범위의 정치, 손을 내밀면 다독이거나 때려줄 수 있는 범위의 정치, 자신에게 중요한 결정에는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범위의 정치에서만 자치는 작동할 수 있다.
3) 비판과 견제를 넘어 초록의 대안을 실현할 공간인 지역
폭력, 차별, 환경파괴에 반대하는 활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수많은 잘못을 비판하고 못 하도록 막는 일을 넘어 조금씩이나마 우리가 품은 가치를 실제로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지역에 주목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국가라는 거대한 공간보다는 지역에서 더 손쉽겠다는 다소 얄팍한 생각이 없지 않았겠지만, 작은 공간에서 대안의 작동 가능성과 혜택을 입증하지 않고 큰 변화를 실현할 길을 찾지 못하겠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전국적 반핵운동이 비판과 저지에 주력해온 반면 부안의 반핵주민운동은 자치역량과 결합하여 지역의 생태적 발전을 꾀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시에는) 기대했고, 과천 사람들은 학교 현장에서 인종과 성별, 성적 때문에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침으로서 평화를 구체화하고 있으며, 일본의 생활인 지역정당들은 지방정부에게 무얼 하라고 요구하기 앞서 자신이 만족할만한 노인복지시설, 보육기관을 스스로 만들어 입증하고 있다.
어쨌든 지역은, 작지만 의미 있는 실질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곳이다. 더구나 지금이 어떤 땐가? 꾸리찌바니 포르투알레그레니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지역들의 성공이 순식간에 지구로 퍼져나가는 때 아닌가?
풀뿌리 지방자치에 위와 같은 기대를 하게 된 데는 나름대로 배경이 있었다. 시민사회에 지방자치의 참여의 경험이 조금씩 축적되면서 더 좋은 개인을 당선시켜보자는 활동은 지역정치의 변화를 임무로 하는 새로운 운동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모색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특정 부문이나 단체의 과제를 넘어서는 지역 공동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지역정치에 참여할 주체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고민을 하는 지역도 있었다. 대통령을 몇 번 바꾸어 보아도 이것만으로 실질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경험에서 풀뿌리 주민자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학교급식조례 제정운동의 경우처럼 지역에서 스스로 대안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기도 했다. 상당히 많은 지역시민사회단체들이 지방선거 참여를 적극적으로 고려했고, 몇몇 지역에서는 지역정치운동을 내건 조직화를 시도하기도 했으며, 새판짜기를 지향하는 여성의 정치활동 영역으로서 지방자치 공간이 주목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거의 모든 시민사회단체들은 정치와는 분리된 자기 영역으로 돌아갔고, 더 많은 고참 활동가들이 정부기관이나 반관반민기구로, 혹은 운동을 ‘지원’하는 분야로 자리를 옮겼고, 기성정당들은 풀뿌리 지방자치의 실험을 싹부터 말릴 제도개악을 감행했고, 여기 줄서지 않았던 도전자들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전멸하다시피 했다.
2. 풀뿌리 지방자치의 현실
중앙정치의 눈부신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의 현실, 특히 지역권력구조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과천은 신도시로 개발된 지 20년이 넘었고 주민구성이 극적으로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보조금, 주요 지역언론, 크고 작은 의사결정 참여, 사업을 위탁받을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변화가 없다.
지역의 권력구조라 하면 의회와 단체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보를 얻고 발언할 수 있고 자원을 차지할 수 있는 철옹성처럼 단단한 풀뿌리 지역세력이 지역 권력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군사정권시절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단체들이 보조금을 독차지하고 있고 시의원들의 휴대폰 번호를 가지고 있다. 통반장이나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 각 동 주민자치위원회의 구성이 시의회만큼이나, 혹은 그 보다 더 중요하다.
정부 방침에 따라 시의 보조금을 받는 단체들이 지원금을 받아 견학 가는 버스 안에서 다시는 운동권 대통령 뽑지 말아야 한다고 서로 교육하는 장면이 상상이 되는가? 중앙의 권력을 잡으면 풀뿌리의 기성세력쯤은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안일함이 지금의 정권을 사면초가에 빠지게 했다.
정부에 적대적인 언론이 만든 구호와 논리는 앞서 말한 버스 안에서 공유되고 골목에서 유포되며, 이 논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지역의 자원을 독점함으로써 이 논리는 앞도적인 발언 기회를 갖게 된다. 대통령이나 국회라는 권력의 표층이 어떻게 바뀌어도 풀뿌리 지방자치는 여전히 과거회귀의 거대한 에너지원으로 남아 있다. 이 심층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진보나 초록은 요원하다.
최근 필자는 수도분할에 관한 국민투표를 국회에 청원하자며 시의원으로서 서명을 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가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시장이나 다른 시의원들이 나서지 않는다. 지역언론에서 과천시민인지 의심스럽다고 쓰고 주민자치위원들이 왜 서명하지 않느냐며 항의한다. 법률적으로는 불법 노점상인 과천의 유일한 재래시장을 대책 없이 쫓아내서는 안 된다는 입장 때문에 인근 아파트입주자대표들로부터 질타를 받는다. 사회단체들에 대한 엉뚱한 예산을 지적하는 일은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다. 효과를 입증할 수 없는 시시티브이 설치 예산에 문제제기를 하면 주민들로부터 질타를 받을 것이라고 공무원들로부터 충고를 듣는다. 이 분들이 의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시의원들이 언제 굴복하느냐 하는 문제는 단지 시점의 문제일 뿐이다.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 지역 시민단체들은 최근 몇 년간 대단한 역할을 해왔다. 어떤 보조금도 없이 지역 저소득 청소년을 위한 방과후학교를 세웠고 지금도 지역에서 가장 모범적인 시설로 공인되고 있다. 월간 4면이라는 초라한 분량이지만 시의 보도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들이 기사를 쓰고 직접 배포하는, 디자인도 가장 멋진 지역언론을 창간했다. 그 와중에도 각자가 학교운영위원회에 대거 참여하여 교육현실을 변화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조금이나 제도에서의 역할은 여전히 낯설고 불편한 일이다. 의회에 있는 입장에서 이분들은 너무 멀리 있고 늘 관의 주변에 계셨던 분들은 항상 사방을 지키고 서 있는 형국이다.
대안을 실현하는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하지만 밑천은 거의 없다. 의회에는 정책보좌기능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수많은 전문가들은 실제 지역에서 작동할 수 있는 작은 정책에 관해서는 알지 못한다. 지역시민단체들의 선한 의도와 활동은 아직 정책이나 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나마 혼자 연구할 시간은 이런저런 행사에 얼굴 내미는 일로 쪼개진다. 이런 행사에 별다른 이유 없이 자주 불참하는 것은 면전에서 상대를 거절하는 것처럼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중앙정부가 지방에 요구하는 좋은 정책들이 많다. 그러나 가져오는 것은 근사한 이름뿐이다. 이번에 통과된 주민참여예산조례는 정보공개와 주민 참여에 관한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 이런 정책에 의미를 부여하고 애쓰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는 허탈감만 준다.
도서관이나 청소년수련관 같은 시설에조차 주민들이나 이용자들의 참여가 배려되어 있지 않다. 개관을 앞둔 청소년수련관은 1층이 영어마을이다. 또 하나의 사교육 시설이 될 것 같다. 교육지원과가 새로 생겼는데 여기서 쓰는 영어교육과 관련한 예산이 우리 시 예산의 1퍼센트를 넘는다. 학교에서 살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다른 기회를 제공하는 예산은 찾아볼 수 없다.
3. 풀뿌리 지방자치에서 희망을 이어가기 위해
큰 정당들이 입맛대로 만들어낸 어이없는 선거제도와 정당제도로 인해 풀뿌리 지방자치의 새로운 실험이 한풀 꺾인 것 같지만, 실제 역량이 성장하고 있다면 이런 훼방은 아주 잠시만 효과적일 뿐이다. 이건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지역과 전국 차원의 시민사회운동이 변화의 열망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10년 전에는 녹색정치를 꿈꾸지 않는 환경운동가를 보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언젠가는 그것이 자기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환경운동가를 보기 힘들다. 비단 환경운동만이 아니다. 새판짜기, 틀 바꾸기를 위해 자기 영역을 뛰어넘는 모습은 기대하기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실험도 모험도 보기 힘들다. 있는 지지자와 후원자들에게 호소하는 활동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전히 희망은 지역에 있다고 믿는다. 생활인들은 그저 주어진 대로 만족하고 지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 주변에 널린 유해한 음식과 살충제를 그냥 두고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몸으로 대안을 찾고 있다. 날개달린 집값을 보면서 중앙정부의 호언장담만 믿고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게 과천 유권자의 절반이 넘는 세입자들이다. 전세융자금 지원 기금을 늘리든 다세대주택을 임대주택으로 개조해서 제공하든 어쨌든 살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생활인들이다. 성명서나 언론보도나 토론회 따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실질적 변화가 필요한 것이 생활인의 입장이다.
현실의 풀뿌리 지방자치에서는 이들 생활인들에게 정보든 참여의 기회든 보조금이든 발언권이든 주어지지 않고 있다. 정보와 참여의 기회를 주고,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고 발언이 작은 변화로 이어지는 경험을 축적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키는 경험을 쌓아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자치단체의 예산서를 몇 쪽 분량으로 요약하여 보여주면 분노하지 않는 시민이 없다. 이것이 시작일 수 있다. 발언하고 감시하면 시의원들의 태도가 바뀌고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사실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너무 자주 분개하고 홀로 판단하고 헤쳐 나가려 하다 풀뿌리 일꾼들이 지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