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설명: 지난 여름 우리 공부방 친구들과 함께 물놀이 갔을 때의 주훈이
지난 금요일, 가정방문 멘토링 때 만났던 주훈(가명)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며칠 전 19일(월)에 주훈이를 만나러 가면서도 내가 힘이 될 수 있을까 걱정되었고 주저하곤 했다. 거의 반년만에 아빠를 만나는 건데 다시 술을 드시고 만나길 거부하면 어떻게 할지, 괜히 상황만 더 꼬이게 하면 주훈이에게 미안해서 어쩌지...
주변 분들의 여러 조언을 듣고 주훈이네 공부방 선생님(이하 ‘주현 쌤’)과도 의견을 모아 우선 이번에는 인사드리는 것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차츰차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가 되도록...
오후 선거운동을 포기하고 약속 장소로 일찍 출발했다. 마침 주훈이네 공부방 누나와 형이 있어 핸드폰 번호도 주고받고 안부도 전했다. 이 두 친구는 주현 쌤과 내가 주훈이네 집을 방문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에 살짝 삐칠 줄 알고 걱정했는데(혹시 몰라 오랜만에 인사드리려고 왔다고 했다) 오히려 주훈이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공부방에서 말썽도 부리고 버릇이 없어서 혼냈다는 이야기, 공부방 끝나고 저기, 아니면 저기 pc방에서 놀고 있을 거라는 얘기 등등... 주훈이가 pc방에 있다가 오늘 약속을 까먹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을 찰나, 멀리서 아이스크림을 양손 가득히 들고 오는 주훈이가 보였다.
처음에는 멈칫대던 주훈이가 반갑다고 인사했다. 곧 주현 쌤도 오셨다. 공부방에서 저녁급식 먹고 같이 오는 길에 주훈이나 다른 친구들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주신 것이었다.
우선 주훈이네 집에 갔다. 가는 길 내내 주훈이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보다는 뭔지 모를 어색함, 침묵, 아픔이 느껴져서 나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앙물거나 실없는 농담을 했다.
아빠는 주무시고 계셨다. 처음으로 주현 쌤과 인사하신 것인데 초췌하고 기운이 다 빠진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우셨는지 방에서 나오질 못하고 주훈이보고 손님을 접대하라고 하셨다. 주훈이는 아빠가 들으실 게 뻔한데도 일주일 넘게 아빠가 술 드시다가 전날에 깨셨다고 이야기한다. 물과 술만 마시며 보름이 넘게 지내셨다는데 술기운도 남아있고 기운이 하나도 없으셔서 누워계신 것이었다. ‘음... 인사한 것으로 만족하자...’
가져온 딸기를 주현 쌤이 씻어서 아빠에게 전해드리고 주훈이와 함께 우리라도 담소를 나눠볼까 했는데 갑자기 주훈이가 바빠졌다. 곧 태권도장에 가야하는데 밥을 먹고 가야한다는 거다. 식용유도 뿌리지 않고 후라이팬에 계란을 깨어 달걀후라이를 하고, 오랫동안 보온밥통에 있어서인지 딱딱하게 굳은 밥에 그걸 얹어서 비벼 먹는다. ‘할머니도 안계신데 밥은 누가 하고 계시지?’라는 생각도 들고 안쓰러웠지만 옆에서 살짝 거들어주면서 스스로 밥을 차려먹게 두었다. 주훈이가 감당해내야 할 현실이기 때문에. 바로 전에 공부방에서 급식을 먹고 오는 것인데도 꼭 먹고 태권도장에 가는 주훈이... 초등학교 4학년이니 한창 먹을 때다.
다음으로 엄마가 일하시는 중국집으로 갔다. 나나 주현 쌤 모두 주훈이 엄마는 처를 뵙는 거였다. 그런데 주훈이가 멀리서부터 엄마를 알아보고 ‘저분’이라고 하신다. 막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신 분이 엄마였다. 하지만 주훈이 엄마는 우리와 이야기하기 어려우신지 사장 님에게 도움을 청하신다. 9년이 넘게 주훈이네와 이웃해서 살고 계신분이고 주훈이네 사정이 딱해서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주훈이 엄마에게 허드렛일을 할 수 있도록 챙겨주고 계신 분이다. 옆에서는 같이 일하시는 분이 주훈이가 또 혼날 일을 저지르고 온 것은 아닌지 걱정하신다. 이런저런 주훈이 일로 항의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게 아닌데... 그리고 그런 얘기는 주훈이 앞에서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다행히 공부방 얘기, 주훈이가 잘 어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리를 마쳤다.
돌아오는 길에 주훈이에게 물었다. 집에 이렇게 찾아오는 게 부담되지는 않는지. 주훈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괜찮아요”라고 이야기한다. “태권도장에서 여덟시면 돌아오는데 엄마가 11시에 일 끝나니 친구인 중국집 아들과 놀면 되지 않을까”라고 물었더니 시무룩해한다. 아무래도 뭔가 사연이 있는 건지 어려운 것 같다.
주훈이는 태권도장으로 떠났다. 남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했다. 기초생활 수급을 받을 수 있도록 동사무소에 알아보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현재의 제도들로는 어려운 가정형편 임에도 도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주훈이에게는 그렇지 않다지만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할머니도 감당하지 못하시고 멀리 피신해계신 상황이다. 당장은 답이 없다. 주훈이 옆에 있어주는 것 밖에 없다. 그래도 중국집 사장 님이 오랜 이웃이니 주훈이 아빠를 잘 설득하실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 후속 이야기:
- 다음 날 할머님이 공부방에 오셨다고 한다. 집 까지 찾아와주셔서 너무 고맙다고 할머님이 전화하셨는데 아드님(주훈이 아빠)이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하신다. 중국집 사장 님 말은 주훈이 아빠가 잘 듣는다고 하셔서 병원에 가서 링겔이라도 맞으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이야기하기로 했다.
- 주훈이 집 바로 인근 <성북청소년자활지원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와이프(wife)가 주훈이 이야기를 듣고 마침 월, 화요일에 야근을 하니 다음 주부터 챙겨주겠다고 한다. 본인도 바쁠텐데... 너무 고마웠다. 주훈이 공부방 선생님도 다행이라고 너무 고맙다고 하신다. 주훈이 주변에 주훈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주훈이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공부방과 주현 쌤이 더 노력하시겠다고 하신다. 우리가 바라는 선생님, 주훈이가 의지할 수 있는 선생님이 계셔서 다행이다.
다음 주에 와이프를 도와 주훈이에게 루미큐브라는 보드게임 노하우를 전수해주어야겠다.
- 신희철(사회당 서울시당 사무국장, http://blog.naver.com/commune96)